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렌티니아누스 1세 (문단 편집) === 즉위 이전 === 그라티아누스 푸나리우스(혹은 대 그라티아누스)의 아들로 321년 [[판노니아]]의 키발라이에서 태어났다. 아버지 대 그라티아누스는 원래 밧줄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는데, 힘이 세기로 소문이 자자했다.[* 푸나리우스라는 별명은 라틴어로 줄, 밧줄을 뜻하는 푸니스(funis)에서 유래했다. 그라티아누스는 특히 팔힘이 센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.] 이후 그는 군에 입대하여 아프리카 코메스 둑스의 지위까지 이르렀다. 어린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다니면서 자랐다. 대 그라티아누스는 배움이 짧은 것이 한이 되었는지 아들에게는 교양 교육을 시켰는데, 단순히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.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에 입대했다. 그러나 그의 군 경력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. 356년 그는 [[율리아누스]]와 [[콘스탄티우스 2세]] 간의 정치적 대립에 휘말려 해임되었고, 일설에 의하면 율리아누스가 즉위한 후 등용되었다가 종교적 문제로 또 해임되었다고 한다. 그가 다시 군에 들어온 것은 요비아누스 황제 때였다. 요비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용맹을 높이 사 스콜라이 스쿠타리오룸의 장교로 임명했고, 발렌티니아누스는 요비아누스의 장인을 따라 갈리아에 다녀오기도 했다.[* 그러나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요비아누스 황제의 장인은 죽고, 발렌티니아누스는 간신히 살아남았다.] 그 이후 제국 동방으로 돌아온 발렌티니아누스는 안키라에 파견되어 있었다. 364년 초, [[요비아누스]]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길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. 고위 문무관들은 니케아에 모여, 다음 황제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. 그들이 두 명의 후보를 제치고 선택한 사람은 다름아닌 발렌티니아누스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